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쇼토쿠 태자 (문단 편집) == 역사적 과장과 허구설 논쟁 == 결론적으로, 쇼토쿠태자 행적이 역사적으로 과장되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받으나, 허구설은 정설 내지 주류설이 아닌 극단적인 일설이다. 쇼토쿠 태자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것은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쇼토쿠 태자의 행적 상당수가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쇼토쿠 태자가 반포했다고 하는 '[[17조 헌법]]'은 일찍이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가 당시 일본 열도가 중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 및 여러 문장상의 특징 등으로 보아 [[덴무 덴노]] 시대 이후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식민사학]]자로 유명한 인물인 쓰다는 1940년 [[만세일계]]를 부정하고 [[스진 덴노]] 이전의 왕가를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가([[결사팔대]] 참조) 형을 살기도 하는 등, 일본 사학계 내에서는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일본서기>의 철저한 비판을 이끌어낸 선구적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언급된다. 문제는 그 자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삼국사기]] 등에는 더욱 강하게 나타나 결과적으로 한국의 고대사 문헌에 회의적인 입장을 도출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측면에서는 근대 [[실증주의]]라는 관점이 가져올 수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찬반 양론이 치열하게 제시되었으나, 이후 모리 히로미치(森博達)는 언어학적인 입장에서 [[17조 헌법]]의 한문체는 7세기 초에는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역사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부정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국내에서는 황소자리 출판사에서 심경호에 의해 번역된 『일본서기의 비밀』(2006)에 실리기도 하였다. 또 쇼토쿠 태자의 저작으로 알려진 <삼경의소(三經義疎)>(<법화경의소(法華經義疏)>, <승만경의소(勝鬘經義疏)>, <유마경의소(維摩經義疎)>의 3종류 문서)는 마찬가지로 이후 시대에 성립했으리라는 설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등 학자들이 제기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의 [[둔황]] 문서에서 발견된 <법화의기(法華義記)>, <승만경의소본의(勝鬘經義疏本義)>, <유마경의기(維摩經義記)>라는 문헌과 <삼경의소>의 내용이 70% 가까이 동일하다는 점이 드러나, 적어도 쇼토쿠 태자가 전체 내용을 직접 썼다는 서술은 분명히 틀렸음이 확실해졌다. 현재로서는 이를 8세기의 위작으로 보는 설과, 수대 중국과 교류하며 수입한 경전 주석서를 쇼토쿠 태자의 저작으로 조작했을 가능성 등이 제시되었다. 물론 후자의 설에서는 돈황 문서의 서술연대를 입증해야 하는 꽤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그 밖에 호류지 약사여래상(法隆寺 藥師如来像), 호류지 석가삼존상(法隆寺 釋迦三尊像)의 명문에서 쇼토쿠 태자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을 기술했는데, 1930년대 후쿠야마 도시오(福山敏男)가 문제를 제기한 이후로 이 명문에 등장하는 '치천하천황(治天下天皇)', '원흥(元興)', '법황(法皇)' 등 용어가 8세기 후반 이후에만 성립 가능하다는 설을 제시하여 반론 측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다. 또 마찬가지로 쇼토쿠 태자의 행적과 관련된 천수국 수장(天壽國繡帳)이라는 자료가 있는데, 이 천수국 수장에 나타난 일본어의 한자 음차 표기가 7세기까지 한자음보다는 8세기 한자음에 어울린다는 지적, 천수국 수장의 날짜 표기(일간지와 일자)가 [[지토 천황]](재위 690~697) 시기까지 쓰인 역법인 원가력(元嘉曆)이 아니라 지토 천황 이후 쓰인 의봉력(儀鳳曆)과 맞아떨어진다(정확히는 1일 차이)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였다. 사실 9세기 이후에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 9세기 이후 일본에서는 이른바 '신불습합' 경향 때문에 불교와 관련지어 신격화하고 기원설화를 조작하는 일이 성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열도에서 불교를 퍼뜨리는 데 큰 공적을 세웠다는 왕가의 인물 쇼토쿠 태자는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이전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던 행적이 후대 문헌에서 널리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전반의 연구에서는 8세기 전반까지 자료까지 신뢰성을 의심하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쇼토쿠 태자 당대의 유물이라는 7세기 자료까지도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 이런 문제의식이 근대 역사학이 성립되기 전이라고 아예 없지는 않았다.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등 근대 초기의 인물부터 쇼토쿠 태자가 허구적인 인물이라거나 그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지적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근래에 이러한 설을 가장 종합적으로 다룬 인물로는 오야마 세이이치(大山誠一)가 있는데, 1999년 저작에서 그는 이상의 쇼토쿠 태자 관련 자료들이 8세기 중엽에 조작된 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주장을 학문적으로 종합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국내에도 이미 소개된 적이 있다. 2012년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번역한 오야마 세이이치, <일본서기와 천황제의 창출>에 관련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문제는 이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주장이 7세기 일본 역사가 모두 거짓이라는 식으로 과잉 해석된다는 것이다. 일단 당시 일본 열도에 유력한 국가가 있었음은 <[[수서]]> 왜국전으로도 명확히 나온다. 또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관위 12계' 등 국가체제는 <수서> 왜국전에서도 확인하고 대응할 수 있다. 여러 논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 일본 열도에 일정한 수준을 갖춘 국가가 있었음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부정하지 않는다. 또 고고학적 발굴이 진전되면서, <일본서기>의 기술과 같이 당시에 [[아스카]]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화된 국가가 있었다는 점, 6세기 후반부터 불교 건축이 이 지역에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 쇼토쿠 태자의 근거지라고 한 이카루가 궁(斑鳩宮)이 실제로 7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는 점, 서쪽 해안 방면으로의 도로의 건축 등 중국과의 교류를 염두에 둔 대규모의 국가 사업이 진행되었다는 점 등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과장된 서술과 부분적인 오류 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일본서기>에 기술된 이 즈음의 국가 형성 과정은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에 번역된 서적이 많지는 않으나, 앞의 오야마 세이이치의 번역서에서도 일정 부분 인정하는 것이 있으니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나온 『일본사의 변혁기를 본다』(지식산업사)에 실린 이근우의 글(「고대 일본의 율령제律令制 도입과 국가권력의 시각화視覺化」 )라는 글과 2014년 번역된 이치 히로키, 『아스카의 목간』(주류성)에서 소개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오야마 세이이치조차도 쇼토쿠 태자의 원형이 되는 인물인 '''우마야도 왕은 존재했다고''' 분명히 인정한다. 다시 말해 당시 왕가의 일원으로서 이카루가 궁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력한 정치인물이 있었음은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오야마는 이 두 논지를 별 문제 의식 없이 섞어 사용했지만, '쇼토쿠 태자는 없었다.'는 문장과 '쇼토쿠 태자의 원형이 되는 인물은 있었지만 행적이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주장의 온도차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오야마의 주장은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그의 주장은 [[소가노 우마코]]-[[소가노 에미시]] 부자가 당시의 왜국 왕가였다는 주장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 구조는 ①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왕)의 행적은 후대에 많이 조작되었다 ② <수서> 왜국전에 등장하는 왕은 남성이다(= [[스이코 덴노]]가 아니다) ③ 당시 일본 열도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은 소가씨 일가였으므로, 소가씨 일가가 군주였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음은 사실이지만 이 논리 구조가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령 수의 사신을 만난 남성 왕이 일종의 섭정 개념으로 통치하던 우마야도 왕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스이코 덴노가 군주가 아니었다'고 치고 넘어가더라도 소가씨가 군주였다는 주장의 입증에는 더 많은 근거가 필요함에도 현재로서는 당대 자료가 없다시피 하고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다. 이후 일본사에 보이는 여러 [[바지사장]]의 형태([[천황]]-[[상황]]/[[법황]]/[[섭정]]/[[관백]], [[천황]]-[[쇼군]], [[쇼군]]-[[싯켄]], [[쇼군]]-[[오고쇼]] 등)를 보아도, 소가 씨가 왕가가 아닌 채로 국정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문제도 있다. 덧붙여 앞서 언급한 호류지 석가삼존상에서는 1989년 재조사하여 대좌(불상 받침대) 안에서 묵서명을 발견하였다. 이 묵서명은 석가삼존상 대좌를 보수하면서 묵서명이 씐 목재를 채워넣으면서 남은 듯한데, 여기서 "신사년(辛巳年) 8월 9일 만들었다(辛巳年八月九月作)."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신사년은 621년 또는 681년인데 오야마 세이이치는 681년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7~8세기 목간을 연구해 온 학자 이치 히로키(市大樹)에 따르면, 이 묵서명에 나오는 '고관(尻官)'은 '고(尻)'가 '시리(しり)' 또는 '시로(しろ)'로 읽혀 [[다이카 개신]](646) 이전의 왕실 직할령을 말하는 '나시로(名代)' 또는 '고시로(子代)'의 관청(官)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묵서명이 쓰인 대좌의 '신사년' 묵서명은 다이카 개신 이전인 621년에 쓰인 것이 되며 석가삼존상 자체가 621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점칠 수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절충설이나 재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 해석도 현재로서는 결코 상대의 주장을 찍어 누를 만큼 만만하지 않다는 것. 이 때문에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고, 7세기 자료라는 것도 검토하여 수용할 필요가 있음은 일본 고대사학계에서 상식이 되었다. 그 반면 이른바 '쇼토쿠 태자 허구설'은 파격적이기는 하나 그대로 따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다. 물론 '이런 설도 있다'고 할 만한 주장이기는 하지만, 정설 내지 주류설은 되지 못하는 주장이라는 것. 일본어가 가능하다면 [[일본어 위키백과]]의 [[https://ja.wikipedia.org/wiki/%E8%81%96%E5%BE%B3%E5%A4%AA%E5%AD%90#虚構説|'쇼토쿠 태자' 항목의 허구설 단락]]도 참고. 일본어 위키백과의 신뢰성이 낮다고 하나 이 항목은 전공자의 손이 갔는지 나름대로 충실하게, 최소한 한국에서 찌라시처럼 언급되는 단편적 자료들보다는 훨씬 성실하게 정리하였다. 어쨌든 쇼토쿠 태자의 행적이 과장되었다는 설 자체는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그 영향 때문인지 일본 [[문부과학성]]에서 2017년 2월에 공표한 초, 중학교의 차기 학습지도 요령에서는 기존의 '쇼토쿠 태자'이라는 표기를 '쇼토쿠 태자(우마야도 왕)' 또는 '우마야도 왕(쇼토쿠 태자)'으로 교체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쇼토쿠 태자라는 인물에 후대의 인식과 과장이 더해졌을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고대사학계의 동향을 일정 부분 수용한 것이지만, [[새역모]]와 같은 단체는 이에 대해 '일본 율령 국가 역사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기도 하였다([[http://www.sankei.com/life/news/170307/lif1703070042-n1.html|출처]]). 물론 새역모는 역사연구단체가 아닌 극우정치단체이므로 주의해 읽을 것.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으나 '[[고조선]] 건국 연대가 기원전 2333년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학계의 상식에 따라 해당 서술을 제외할 경우에, [[환단고기]] 추종자들이 보일 반발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